2016년 10월 10일 03시 50분
초록
본 논문은 한국 노동계급의 연대가 약화된 이유와 그 과정을 노동계급 형성과 변형의 시각에서 규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의 최대 산업도시인 울산의 중공업부문 대기업, 특히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의 산업노동자 집단을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본 연구는 계급이 객관적으로 주어진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공간의 맥락 속에서 계급을 구성하는 여러 층위들 간의 우발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이론적 관점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 1987년부터 2010년까지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계급상황, 집단 정체성, 집합행동의 세 가지 층위들 각각의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그 층위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에 주목하였다.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울산지역의 노동계급 형성은 1987년의 대규모 노동자 집합행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매우 동질화된 계급상황을 배경으로 집합행동이 분출하면서 기존의 억압적 노사관계는 빠르게 무너졌다. 그러나 폭발적 동원이 나타난 ‘결정적 국면’에서 구조화된 조직적 유산들은 이후의 노동자 연대를 제약하였다. 1987년 직후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지역 연대가 활성화되었지만 그것이 조직화되거나 제도화되지는 못하였고, 노동자 연대의 범위도 노동시장 분절구조를 뛰어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한적 연대의 전통으로 인하여 울산의 지역노동운동은 소수의 대기업 노조의 전략적 선택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유산 속에서 대기업 노조의 분파적 이익 추구 성향은 점점 커져갔고 지역의 다른 노동자들과의 이해 균열은 넓어졌다.
2) 1990년대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계급상황에서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그 변화는 ‘동질화에서 이질화로’ 요약되며, 그 효과는 ‘연대의 사회적 기반의 침식’이었다. 울산지역의 대기업 노조들은 단체교섭을 통한 임금인상 투쟁을 매개로 조합원의 전투적 동원 전략을 통해 계급형성을 이루어갔다. 전투적 동원의 핵심 기제는 임금극대화와 임금평준화 목표가 결합된 노조 임금정책과 이에 대한 조합원의 높은 호응성이었다. 그러나 대기업 노조의 ‘임금인상의 정치’는 전체 노동계급의 분절과 이질화 추세와 병행하는 것이었다. 대기업 노조운동의 성과는 노동자 연대의 강화로 연결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연대의 사회적 기반이 허물어지는 역설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1990년대 동안 울산지역의 산업노동자들은 전반적인 계급상황에서 동질적 계급으로 보기 힘들어질 만큼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3) 대기업 산업노동자들의 생활세계 또한 1990년대를 거치며 크게 변형되었다. 임금소득의 상승, 가족임금의 성취, 소비구조의 고도화, 가정중심성에 기반한 가족생활 양식의 확산 등이 대기업 노동자의 생활세계 변형의 주요 내용이다. 1990년대의 이러한 삶의 변형은 1세대 산업노동자의 생애과정에서 뚜렷한 신분상승으로 경험되었고, 한국의 대기업 노동자 집단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산층화’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중산층화는 남성 노동자의 삶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부분적인 것이었다. 신분상승과 생활의 안락함이 장시간의 공장노동과 교환되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노고의 대가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게 남성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은 중산층화된 ‘생활세계’와 육체노동의 현실이 지배하는 ‘공장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극 속에서 규정되었다. 한편으로, 이 문화적 간극 속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경제적 생계부양자 역할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하는데, 임금인상 위주의 노조운동이 남성 노동자들의 이러한 정체성을 집단적 방식으로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문화적 간극은 ‘도구적 집단주의’의 행위 성향이 확대·재생산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즉 노동자 특유의 집단주의가 계급적 연대보다는 노동자 개인의 지위 상승을 위한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