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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일본 방송매체의 납치사건 보도와 여론형성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2016년 10월 07일 10시 29분


초록

이 논문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가 일본 미디어에서 어떻게 의제화되고 사회적 쟁점으로 발전하게 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2002년 9월 17일 일?북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은 처음으로 일본인의 납치를 인정했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 내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중요한 국가적 현안이 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왜 2002년까지 납치 문제가 방치되어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1980년대부터 이미 수차례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미디어, 심지어는 정부도 이 납치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관심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사실 일본인 납치 문제는 미디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보다도 당사 국가간의 태도, 주변 국가의 정치적 요인이나 국제적 요인 등이 문제해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미디어의 보도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여론을 조성하고, 정부에 대해 국민의 의사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무시못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일본의 방송 매체가 납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그 방식을 정리해서 분석할 것이다. 특히 납치 보도에 접근하는 행위자와 그 행위자가 가지는 관심을 고찰해, 시기나 현안에 의해 어느 행위자가 어떠한 관심으로 납치 보도에 접근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미디어가 납치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내용을 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종종 이 납치 문제에 대한 접근이 「감정적이다」라는 반응과 일본이 납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이엥게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북 정상회담 이전에 북한에 대한 사회적 이슈는 「귀국 사업」이었다. 1960년대 북한은「낙원의 땅」이라고 불려 많은 재일조선인이 `귀국′했다. 당시 북한의 정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일부 연구자나 공산당계의 정치가뿐이었고, 일본인 대부분은 북한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1970년부터 1980년에 걸쳐 일본 각지에서 실종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련의 실종 사건들이 북한에 의한 납치설이라고 일부 미디어 관계자나 연구자들이 주장함으로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일본 내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반응이 아직은 미약하여 납치 피해자를 구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크지 않았다.

2002년 9월 17일에 (前)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이 결정된 이후, 납치 문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한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텔레비전이었다. 연일 납치 피해자 가족의 심정이나 사건의 심각성을 방송을 통해 보도 함으로 여론도 이 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국교 정상화를 제일 목표로 삼고 있었던 일본 정부도 납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담을 통해서「5 명 생존, 8명 사망 」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납치 피해자의 가족뿐만아니라 여론도 슬픔과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이 때 텔레비전은 가족의 심정이나 감정에 관심을 갖고 일본 대표적인 텔레비전 방송인 「와이드쇼」를 중심으로 납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일반적인 방송과는 달리 와이드쇼는 과잉된 연출과 신빙성 낮은 증언도 극적인 전달을 위해서 이용하기 때문에, 와이드쇼에 의해서 전해지는 방송들은 상당히 감정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래서 이 방송때문에 여론의 관심은 더욱 더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와이드쇼는 납치 문제의 심각함을 희석시키지 않고, 가족의 심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점이 일정 부분 의의가 있었지만,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구체적인 방법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미디어는 시청률을 올릴 목적으로 납치 문제를 납치 피해자가 일본에 귀국한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춰 다루기 시작한다. 이러는 와중에 납치 문제는 미디어의 상품이 되어 과잉 취재로 이어지고, 납치 피해자를 구출해 진상을 규명하기 바라는 가족들과 납치 문제를 상품화하여 방송률을 올리려는 미디어 사이에는 관심의 차이로 딜레마가 발생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감정적 납치 보도의 여파로 인해 수많은 폐해도 생기게 되었다. 와이드쇼에서는 납치 문제 이외에도 북한의 체제나 김정일에 대해서도 방송하면서 북한은 무섭고 이해 불가능한 국가라는 인상을 시청자에게 강하게 심어주게 되었다. 이로인해 북한의 일반 국민까지 비하하는 발언들이 나오고, 일본에서 성실히 생활하고 있는 재일 코리안에게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인터넷에서도 mixi라는 SNS를 통하여 북한에 대한 비이성적인 여론 일어나고 그들에 대해 배타적인 분위기도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납치 피해자의 구출을 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나 피해자의 구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북한을 폄하하고 있을 뿐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과격한 발언을 하는 사람과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의 양단 대립 구도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현재 납치 문제를 다룰 때 과거의 역사 문제와 결부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그 문제만을 떼내어 독립적인 문제로 해결을 도모해야 하는 것인지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그것을 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도리어 강경하게 북한과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일본의 과거 역사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의 제시없이 첨예한 대립만 하고 있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의 방송 매체, 특히 와이드쇼를 통해 다루어져 온 납치 문제는 대중에게 납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피해 당사자의 심정을 전하고 납치 문제를 이슈화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와이드쇼의 방영 이후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배타적으로 행동하고 비이성적인 발언들을 보였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보면 언론의 활동이 결론적으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아닌 장애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끝으로3시간에 걸처 이뤄진 납치 피해자인 요코타 부부의 2005년에 7월22일 인터뷰, 납치 피해자 가족들 중심으로 행해진 2003년 5월7일 제5회 국민대집회, 2005년6월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진행된 수상관저 앞 데모 등을 근거로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납치 피해자 가족의 생각과 지원자들의 의견을 토대로 고찰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첨언해 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