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20분
초록
이 연구는 1905년 일제가 학정참여관(學政參與官; 학부 고문)을 통해 한국 교육에 간섭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병합 직후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그 구상과 실행의 관련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체계가 성립되는 과정과 그 동학을 구명하고자 한다.
근대교육이 전통적인 교육과 구분되는 결정적 특징은 그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발전을 위해 기능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국민교육이라는데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개항을 전후로 하여 ‘국민’교육에 대한 논의와 시도가 있었다. 갑오교육개혁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교육사는 이내 일제의 침략과 침략적 교육정책에 의해 식민지 교육사로 바뀌고 말았다. 일제는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러일전쟁 이후부터, 곧 1905년 이후부터 한국의 교육에도 간섭,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한국 병합과 더불어 본격적인 식민지 교육체계의 구축과 식민지 교육정책의 시행에 들어갔다. 따라서 1905년부터 병합 직후인 191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체계가 성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이후 35년간의 식민지 지배와 교육정책의 초석을 다진 시기였다. 동시에 해방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 잔재가 남아 있는 현대 한국사회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시기라고 할 것이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시기 일제의 교육정책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구상과 실행이라는 양 계기로 분해하는 시각을 제시하는 이유는 기존 연구에서 암암리에 전제되어 왔던 바의, “실체로서의 정책”이라는 전제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즉, 기존의 많은 연구들에서는 일제의 교육정책을 그 자체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고, 그 성격도 단일하게 “침략적”이다, 혹은 “근대적”이다,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된다. 본 연구는 일제의 정책이 초기 구상되어서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 속에서 실행되고, 왜곡되는 과정의 동학을 고찰함으로써 일제의 정책이 단일의 실체라는 가정을 극복하려 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일제 식민지 교육정책의 최초 구상이라고 할 수 있을, 일제 학정참여관(學政參與官; 학부 고문)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의 ?한국교육개량안(韓國敎育改良案)?(1905)을 분석하였다. 이것은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대한제국의 일본인 학부 고문으로 부임한 시데하라가 자신의 ‘한국교육개량’ 계획을 본국에 보고한 것이다. ?한국교육개량안?을 통해 볼 때, 시데하라는 ‘점진적 동화주의(同化主義)’의 방법으로 한국의 교육을 ‘개량’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당분간 한국에서 “간이(簡易)하고 비근(卑近)한 교육”, “인문교육에 대한 기술교육 우선” 등의 구상을 정책화하였다. 이것은 일본 본국의 교육과 한국의 교육을 차별하는 발상이다. 그러나 그는 문명개화론의 관점에서 한국을 ‘문명화’시킨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의 구상 속에서는 장래 한국에 일본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시행할 계획까지도 들어 있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교육시키는 것이 중요해지게 된다. 또한 그의 구상은 피교육자, 즉 한국인을 상대적으로 고려한 것이었다. 그는 행정가이기 이전에 학자이고 교육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측면이 문제가 되어, 통감부 설치(1906. 2)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해고되게 된다. 이토는 교육가가 아닌 실무가를 원했기 때문이다. 시데하라는 비록 해고되지만 그의 구상안은 이후에도 계승되어, 식민지 교육체계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을사조약에 따른 통감부 설치 후, 본격적인 침략의 과정에서 일제가 시행한 ‘임시학사확장사업’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것은 단지 구상만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식민지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시작과 동시에 일제는 종래 갑오교육개혁으로 제정되었던 교육제도를 폐지하고, 식민지적 교육제도를 제정하였다. 이 제도에서는 각 단계별 학교의 수업연한이 축소되고, 학제에서 고등교육이 제외되어 중등교육이 사실상의 종결교육이 되었고, 교과과정 속에서 일본어의 비중이 한국어와 동일하거나 그 이상으로 책정되었다. 이 교육제도의 기본구상은 시데하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다소간의 변형을 겪은 것이었다. 달라진 내용은, 주로 교육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 정부와 민간, 개인 간의 책임소재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 등이었다. 시데하라의 구상보다 현실적 고려가 중시된 것이다. 이것은 시데하라의 후임으로 교육가가 아닌 일반 관료와 정치가 지망생 등이 투입된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교육가가 아닌 실무가가 교육을 장악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임시학사확장사업의 내용을 뜯어보면, 대부분의 역량이 보통학교라는 식민지 초등교육기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데하라의 한국교육 개량에 대한 구상은 오직 보통학교의 양적 증대라는 협소한 문제로 귀결된 것이었다.
세 번째로 1908년 이후 임시학사확장사업의 변질에 대해 분석하였다. 임시학사확장비 자금이 바닥이 나고, 통감부의 보호국화 정책도 뜻하지 않은 국내외의 장애를 겪게 된 시점인 1908년 이후에 들어 일제의 교육정책은 탄압 일변도로 돌아서게 된다. ?사립학교령?(1908), ?기부금품 모집 취체규칙?(1909), ?향교재산관리규정?(1910) 등 일련의 민간 교육운동에 대한 탄압 정책이 이 시기부터 시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고양된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고, 민간의 교육운동에 의해 사립학교가 폭발적으로 팽창되던 시기이다. 일제의 교육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사립학교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현상은 일제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별다른 예산의 투입이 없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기관인 보통학교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일제가 기존에 존재하던 사립학교 등을 보통학교화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결국, 1908년 이후부터 일제의 임시학사확장사업은 애초의 선전과 구호는 없어지고 성격은 변질되어 최소의 비용으로 한국의 교육을 장악하는 것이 주가 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병합 직후 식민지 교육정책의 형성과 식민지 교육체계의 성립에 대해 분석해 보았다., 일제가 조선을 공식적으로 통치하게 되었을 때, 일제의 식민지 교육체계의 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조선교육령?이다. 일본 황제의 칙령으로 반포되어 조선에서의 교육만을 규정한 이 법령 속에는, 일제의 조선에 대한 태도의 긴장이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새로 생긴 영토”를 동화해야 하기 때문에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을 지향하는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조선인을 특수하게 교육시킬 것을 지향하는 경향이 상존했다. 이 양자는 물론 시데하라의 구상 속에서부터 존재하는 긴장이었지만, 시데하라에게 존재하던 점진적 ‘동화주의’는 이제 조선총독부의 실무관료들에게서 ‘동화의 불가능’이라는 명제로 바뀌어 있었다. 실제 교육정책의 일선에서는 이러한 ‘동화의 불가능’론이 우세했다.
그런데 일제가 시행한 정책은 ?조선교육령?에 존재하는 이러한 긴장과도 무관하게, 현실적 고려만이 우선시되어 파행을 거듭한 것이었다. 일제는 오직 보통학교의 양적 팽창만을 조선 교육의 공적으로 과시하려 하였으며, 그 이상의 교육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실업교육을 강조하긴 하였으나, 일본 본국에 비하면 한 차원 낮은 수준의 것이었고, 그나마 수업연한이 짧아 설치가 용이한 농업학교가 대다수였다.
이상 일제의 식민지 교육체계가 성립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초기의 동화주의적 구상이 실무형 관료들의 현실적 고려 우선 정책으로 인해 점차 차별주의적 정책으로 변화해 갔으며, 둘째, 그들 모든 구상들은 실제 실행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일제의 교육정책의 성격은 “침략적”이라거나, “근대적”이라는 등의 한 가지 단일한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