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18분
초록
세계화와 함께 ‘민족국가의 위기’, 그리고 ‘민족적 동일성의 위기’가 많은 학술 영역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민족의 자연성에 대한 비판이 결여될 경우 그 해결에는 민족주의인가 사해동포주의인가라는 양자택일만 남는다. 하지만 민족적 동일성이 유일한 초개인적 동일성이자 민족성이 유일한 시민권의 기초인 한 민족주의의 최대화나 최소화 모두 해결불가능한 모순만을 남길 것이다. 양자는 서로를 강화하면서 내·외부적으로 민족적 경계를 강화하며 사회의 집단적 동일성으로서 민족적 동일성을 해체시킬 것이다. 따라서 민족, 특히 민족적 경계를 과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자연적 외피를 벗겨내어야 한다.
민족적 경계와 동일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들에 대한 설명은 내부의 동질화와 외부적 이질화라는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해야 한다. 전자는 에르네스트 겔너 등의 ‘근대화’ 이론가들에 의해 설명이 시도되었다. 겔너는 동질화를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보편적 교육체계를 통해 언어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고 ‘고도문화’가 동질화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겔너의 개념은 민족적 이질성의 근본적 특성인 종족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종족중심성’에 대한 이론가들은 종족성을 민족의 본질적 특징으로 삼는다. 종족성의 개념은 안소니 스미스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는 종족성을 특정한 집단에 계승되어 온 것으로 간주되는 상징·신화 복합체로 개념화한다. 각 진영의 이론가들은 서로 상대방의 이론이 자신들의 것과 배치된다고 간주해 왔으며, 따라서 민족적 동일성의 중요한 특징인 문화적 동질화와 종족성이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동시에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에티엔 발리바가 제시한 개념을 사용하여 외관상 대립되어 보이는 두 요소를 결합하고자 한다. 발리바가 제시한 ‘제도적 동일화’는 제도적 작동 과정을 통해 재생산되는 문화를 각 개인이 가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에 따르면 문화적 동일성은 그 효과에 해당한다. 이것은 제도적 과정을 설명의 대상으로 하고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가상적 동일성을 살펴볼 것을 주장한다. ‘민족형태’라는 그의 또 다른 개념은 학교와 가족에서 재생산되는 언어와 혈통적 관념을 제시하며 그 효과를 검토한다. 이 개념들을 통해 필자는 민족적 동일성을 언어적 동일화와 종족적 동일화의 결합으로 개념화하였다.
필자는 민족적 동일화의 구조적 조건을 산업화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설정한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국가간체계 속에서 발전해 왔는데, 이것은 영토적으로 분할된 국가가 지속적 경쟁관계에 처해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계급투쟁과 여타 사회내적 갈등을 양산했다. 근대적 조건은 각 사회 내부의 산업화를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 갈등을 압도하고 외부 권력에 대해 배타적 주권을 보증하면서 공동체의 물질적 부에 대한 공통의 배타적 소유권을 특정 ‘인민’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문화적 경계를 요구하였다. 근대적 인식양식에서 문화의 배타성과 절대성은 종교적 담론을 통해 얻어질 수 없으며, 과학의 도움을 얻거나 과학을 왜곡함으로써 형성되는 자연성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종족성은 가족에서 재생산되는 혈통적 관념의 도움과 함께 여기에 적합한 문화적 형태가 된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에서 학교에서 재생산되는 문화는 두 가지 제도적 동일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두 가지 형태를 띠게 된다. 산업화의 조건에서 표준화된 언어에 기초한 문화적 동질화를 의미하는 언어적 동일화를 통해 문화는 보편화된다. 국가간체계와 사회적 갈등이라는 조건에서 문화에 대한 계보학적 역사를 구성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종족적 동일화를 통해 문화는 종족화된다. ‘민족적 문화’는 이 두 가지 문화적 형태의 결합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경제적 위기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를 위해 서로 투쟁하게 되었으며 전세계적 이주는 공동체 내부에 복합적인 민족적 경계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시민권을 특정 집단의 배타적 소유물로 간주하면서 민족성을 타자에 대한 공격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용이하게 되었다. 이것은 민족적 동일성을 종족화하면서 가능하고, 그것은 인종적 경계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의 위기는 민족적 동일성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모순은 자본주의적 공동체의 성격, 즉 ‘민족’으로 간주되는 특정 집단의 배타적 공동소유로서의 성격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