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17분
초록
본 논문은 1960-70년대 한국의 국가결핵관리사업의 전개를 두 가지 결핵관리모델의 경합을 통해 검토하였다. 1960-70년대 한국 정부는 세계보건기구의 기술, 재정 지원과 대한결핵협회의 협조를 바탕으로 국가결핵관리사업을 추진하였다.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지원으로 질병관리사업을 추진했던 후진국의 의학전문가들은 세계보건기구의 공중보건학적 관점에 비판적이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논문은 1960년대 한국의 국가결핵관리사업이 어떤 배경과 원인에서 추진될 수 있었는지를 고찰한 후 대한결핵협회와 세계보건기구의 결핵관리모델의 경합의 원인과 양상, 수렴과정을 살펴보았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도덕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국가결핵관리사업을 추진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결핵은 경제개발을 저해하는 요소로 지목되었고 국가결핵관리사업은 더욱 확대되었다. 군사정권과 박정희 정부가 빠른 속도로 국가결핵관리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전 정부가 세계보건기구와 기술지원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고 보건지소를 정비하여 보건소로 승격시키는 등 국가결핵관리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세계보건기구의 결핵관리모델을 채택하여 기술과 재정을 지원받고 대한결핵협회를 동원하여 사업을 추진하였다. 국가결핵관리사업의 전개과정에서 환자집단은 배제되었다. 한국 정부는 입원치료사업을 억제했고 그 결과 1950년대 말까지 활발했던 환자들의 투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후진국의 전염병 통제에 관심이 많았다. 후진국의 전염병관리사업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지만 사업을 추진하려는 국가에는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의 후진국의 결핵관리사업을 위한 공중보건학적 모델은 비용효율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그 모델에서 중요한 사업은 전체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결핵 전염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세계보건기구의 결핵관리모델이 한국의 국가결핵관리사업의 기본 모델로 채택되었으나, 그것은 선택적 수용의 결과였다.
임상의학자들이 많았던 대한결핵협회는 당대의 의학적 도그마에 충실한 결핵관리사업을 주장했다. 이들의 임상의학적 모델은 결핵 전염의 위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환자 집단 모두에 대한 완전한 치료를 주장했다. 사실 대한결핵협회는 때때로 결핵환자를 격리해야 한다는 편견을 드러내었다. 대한결핵협회는 통원치료사업을 차선의 선택으로 받아들였고, 정부의 지원 아래 기금을 조성하여 사업에 참여했다. 이 때 대한결핵협회는 순수한 민간단체라기보다 관민단체의 성격을 지닌 전문가단체였다. 대한결핵협회는 국가결핵관리사업의 실행 과정에 참여하여 임상의학적 모델의 요소를 이식하였다.
두 모델의 대립이 나타난 이유는 1960-70년대 한국의 통원치료사업의 성적이 외국의 실험 결과에 비해 저조했기 때문이다. 치료성공률은 매우 낮았고 치료를 위해 보건소에 등록한 환자의 상당수가 중도에 치료를 중단했고 장기간 치료해도 균음전이 되지 않았다. 대한결핵협회는 세계보건기구의 결핵관리모델의 결점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전국결핵실태조사 결과 결핵유병률이 감소하고 있다는 통계적 수치가 발표되자 양 모델의 경합은 사라졌다.
그 이후로는 왜 당시 한국에서 통원치료사업의 성적이 저조하게 나타났는지에 대한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다. 논쟁의 공백은 두 모델이 사회경제적 요인과 질병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공중보건학적 모델에서 후진국의 빈곤은 사람들이 치료서비스에 접근할 기회를 줄이는 원인으로만 설명되었기 때문에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위해 치료사업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두 모델 모두 결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과학적 치료방법과 예방방법의 도입과 실행이라고 보았고 그 외 사회경제적 조건은 저해요인으로만 다루었다. 즉 두 모델 모두 생의학적 모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논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결핵관리사업의 전개과정은 과학적 치료법을 중심으로 국제적 보건 기구와 국내 의학전문가, 한국 정부가 합의하고 협력하기만 한 과정이 아니라 경합하는 과정이었다. 경합의 원인은 결핵관리사업의 저조한 성적이었는데 이 성적은 후진국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는 세계보건기구의 공중보건학적 관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두 모델의 대립에서 나타난 공백을 고찰할 때, 공중보건학적 모델은 질병과 사회경제적 조건의 관계를 의료자원의 평등한 분배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한계를 보이고 후진국의 치료실패자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외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