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00분
초록
본 논문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화폐의 영토화와 그것의 기능에 관한 연구이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정치체제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근대 초기 서유럽은 도시국가, 세습제국, 중앙집권적 왕국 등 다양한 정치체가 서로의 영토적 경계선을 분명하게 하지 않은 채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면 서유럽의 정치지형은 영토성이 강화된 국민국가들 간의 체계로 바뀌어 있다. 한편 화폐 상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근대적 자본주의가 출현한 16세기 초기 화폐는 영토적 경계선이 불분명한 채 하나의 화폐가 여러 지역에서 통용되고 있었으며, 화폐의 발행과 유통은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관리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에까지 이어져 1787년 영국에서는 단지 8퍼센트의 주화만이 왕립 조폐국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지역에서 화폐발행은 국가의 독점적 권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겹쳐있는 국민국가 형성과 화폐의 영토화는 어떤 관련을 갖고 있을까? 본 논문은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화폐의 영토화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지를 검토하면서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관련된 기존 연구는 국민국가nation-state의 국민적 속성에 초점을 둔 연구, 즉 국민화 혹은 국민적 정체성 형성에 집중한 연구와 국가기구적 측면에 초점을 둔 연구로 크게 나눌 수 있겠다. 연구에서는 이를 ‘국민nation’-국가적 층위와 국민-‘국가state’적 층위로 나누어 분석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국민’-국가에 초점을 둔 연구의 주제로는 주로 국민화 과정에 관한 것으로, 국가 상징(국가國歌, 국기, 퍼레이드 등), 역사적 정체성(국사國史, 박물관 등), 문화적 정체성(국어, 종교 등), 국민화 과정(징병제, 보통교육, 선거권 등) 등을 꼽을 수 있다. 국민-‘국가’에 초점을 둔 연구의 주제로는 국기기구 형성에 관한 것으로, 전쟁수행/수취 기구(상비군, 조세수취기구 등), 질서유지기구(경찰력, 법제도 등), 사회관리기구(관료제, 공식통계 등)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수준에서 화폐 그 자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행해진 연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화폐를 다루더라도 다른 측면들을 예시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언급하는 정도이었으며 국민국가와 화폐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사회제도로서의 화폐가 갖는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화폐는 근대유럽의 중추를 이루는 두가지 흐름, 국가의 재편성과 자본주의의 확산을 매개하는 요소이거나 적어도 둘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국민경제권의 형성은 화폐를 포함한 다양한 접점들을 두고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적 동학이 마주한 한 단면이다. 단순히 교환수단에 머물지 않고, 권력이자 제도로 기능하는 화폐는 국가기구의 중요한 일부이자, 영토 내 주민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화폐는 국민국가의 국민 형성과 국가기구 형성의 측면 모두에 관여하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 두가지 수준에서의 기능은 병렬적으로 나열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 수준의 기능이 다른 것을 상호보조하는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영국에서처럼 화폐가 하나의 국가상징으로 국민적 공감을 획득한다면, 국가가 화폐를 통해 국민경제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또 국가가 조세체제를 통해 농민들을 화폐경제로 이끌어낸 것은 농민들이 지방적?봉건적 경계를 넘어 국민적 정체성으로 포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화폐의 역할을 ‘국민’-국가적 수준과 국민-‘국가’적 수준에서 동시에 파악하고자 한다. 화폐경제의 활성화는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영토 내 구성원들을 국민국가와의 관계로 이끌고, 그들에게 하나의 정치적?경제적 공동체 일원이라는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무시킨다. 또한 화폐는 국가의 재원마련, 행정력 강화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면서 국가기구와 결합되거나 그것을 강화시킨다. 본 연구는 ‘국민국가 형성’과 ‘화폐의 영토화’와의 관련을 1688년 명예혁명 이후에서 1844년 잉글랜드 은행의 지폐 발행 독점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영국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 영국에서의 ‘국민경제권의 형성과 화폐의 영토적 확산’ 그리고 ‘영토적 화폐 형성과 국민국가의 이익’을 중심으로 화폐와 국민국가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데, 여기에는 행정력, 조세체제, 국가의 도시?농촌 흡수, 전국시장의 형성, 화폐주권 등의 사회학적 주제들이 연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