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0일 03시 59분
본 연구는 “식민지 조선의 농정(農政)이 어째서 1930년대에 접어들어 급속히 안정화되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1920년대에 들불처럼 타올랐던 급진적인 소작쟁의는 1930년대 접어들어 합법적․개별적․경제적 소작쟁의로 그 양태가 전환되었다. 1920년대에 혁명운동에 종사했던 식민지의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대 중반 ‘농정통계를 근거로 한 지식논쟁’을 벌이는 전문가로 그 존재의 속성이 전환되었다. 어째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그 정치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명하려는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첫째, 식민국가의 폭력과 억압성에 주목한 연구들은 1930년대의 소작쟁의 가운데 대부분이 「조선소작조정령」(1932), 「조선농지령」(1934) 등 법적 수단에 의거하여 발생하고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둘째, 거시경제지표를 근거로 식민지 경제의 실질적 개선을 주장하는 연구들은 그것이 ‘민족사회’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백하다. 셋째, 식민지 농촌사회에 조합주의론을 적용하여 리더쉽 교체와 갈등의 제도화에 주목한 연구들은 실제로는 리더쉽이 공고하지 못했다는 반론에 직면해 있고, 어떻게 갈등이 제도화될 수 있었는지 그 모멘텀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본 연구는 식민지 농정에 내재된 ‘인식폭력’의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본 연구는 일제하 조선에서 식민국가가 농정 입법, 조사, 그리고 통계를 통해 강제한 ‘인식체계’와 이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비판의 흔적을 발굴하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본 연구가 새롭게 제안하는 연구방법론은 ‘지식생산양식’의 분석이다. 이것은 지식생산의 전제, 즉 아프리오리(a priori)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지식의 생산과정에서 활용된 이론, 자료, 방법 각각의 참조체계(references)를 찾아내고, 그 ‘이식과 변용’ 또는 ‘연쇄와 전유’의 흔적을 발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지식실천이 낳은 정치적 결과를 확인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얻어낸 성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한말 식민권력에 의한 농정의 실천은 메이지기(明治期)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소작’ 개념을 강제적으로 이식하고, 이 개념의 범주에 기초하여 기존의 토지관습을 분류, 조사, 기입(inscription)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전통사회의 이질적인 토지임차 관련 권리들이 ‘소작’이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어 ‘균질화’되었다. 전통사회에서 분할소유권의 성격을 지녔던 권리, 또는 계속 성장해오던 경작자의 권리는 식민국가의 입법과 조사의 실천에 의해 부정되고 박탈되었다. 이들 권리는 식민자(colonizer)가 강제한 ‘소작’ 개념에 의해, 단순한 채권적 토지임차나 『메이지민법』(明治民法, 1898)에서 설정한 영소작으로 약체화되었다. 나아가, 이렇게 구성된 식민지 조선에서의 토지임차권의 법적 지위는, 등기 등의 실질적 실현 사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의 그것에 비해서도 매우 열악한 것이었다.
조선통감부 이래 조선의 토지관습에 관한 조사를 주관했던 이는 우메 겐지로 박사로서, 그는 『메이지민법』의 입법을 주관했던 세 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우메는 조선의 관습에 기초하여 식민지의 법을 만든다는 입법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구상은 법원(法源)이 될 관습이 실은 ‘취사선택된 관습’이라는 진실을 은폐하는 정치적 실천에 불과했다. 『民事慣習回答彙集』의 분석을 통해 식민국가가 ‘취사선택한 관습’에 따라 재판을 진행했다는 사실, 『朝鮮高等法院判例錄』의 분석을 통해 실제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메이지민법』의 관행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정치적 실천을 통해, ‘소작’ 개념이 식민지 사회에 강제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사실은 망각, 은폐되었고, ‘소작’ 개념은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자연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