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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990년대 개신교 신교권그룹의 형성과 헤게모니 세력화에 관한 연구 -

2016년 10월 07일 10시 22분


초록

이 논문은 1990년대 개신교 진영 내에서 신 교권그룹이 형성되는 과정과 개신교 내외부에서의 그것의 헤게모니 전략에 관한 연구이다. 민주화 이전 까지 개신교 진영은 진보?보수의 분명한 구분을 보였으나 민주화의 효과는 진보, 보수 분파 모두에게 새로운 목표 설정을 요구했다. 이러한 가운데 90년대 개신교 진영을 파악하기 위해서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90년대에는 보수파의 연합체인 한기총이 형성되는 등 보수파가 그 세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대형교회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교권 상층이 점유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한 교단을 넘어선 연합형식의 신 교권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부연하자면 성직자 권위주의에 기반 한 위임목사의 과도한 권한집중은 ‘목사의 사제화’란 결과를 낳았고 이는 대형교회일 수 록 더욱 더 그 가능성이 컸다. 더욱이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교단 내에서도 교권 상층을 점유하며 막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교권에 대한 진입장벽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각 교단 교권 상층부 간의 연합 형식의 신 교권 그룹이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들면서 개신교 장 외부의 정치, 사회적 환경변화와 심각한 사회적 공신력 하락은 개신교 전반에 대한 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먼저 개신교 장의 외부적 환경요인에서 비롯된 위기의식을 살펴보면 첫째, 다원화된 사회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보수성은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다. 90년대 이후 개신교의 보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보수 분파 내 교권세력은 정치적, 사회적 태도의 변화 없는 사회참여로의 신학적 전환을 이루었다. 이는 개신교의 도덕적 가치가 위협받고 있는 가운데 성장한 교세를 바탕으로 대 사회적 도덕적, 문화적 담론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개신교의 보수성을 사회적으로 가시화 한 것으로서 생명복제문제, 낙태, 동성애, 환경문제 등 문화적 사회적 아젠다 설정에서 보여준 개신교의 보수성은 변화 되어야 할 것으로 지속적인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로부터 보수 개신교 분파가 경험하는 위기의식은 한국사회에 독특한 것으로 한국개신교가 보수 신학의 기반을 갖고 있음에 따른 것이다.  

둘째, 내부적으로는 개신교가 사회적 공신력 하락에 따른 성장의 둔화 및 정체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신 교권그룹은 기존의 성장의 시기에 보였던 교단 및 교파의 핵분열을 멈추고 조직의 생존전략으로 연합의 전략을 채택하였다. 언론에 개신교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등 부정적 이미지로 노출됨에 따라 한국의 개신교는 90년대 들어 성장의 둔화 및 정체를 경험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별히 성장의 시기에 과도하게 분열되었던 개신교 조직은 재정자립도가 낮은 교단 및 교회 등을 양산하였고 이로 인해 재정과 관련한 각종 비리에 연루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사이비교회의 출현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개신교 교권 헤게모니 세력으로 하여금 개신교 교단간의 통합을 통한 공신력 관리전략을 요청하였으며 이로 인해 진보/보수 교단 간 연합의 움직임이 가시화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이런 상황 가운데 70-80년대 적극적 체제정당화를 담당했던 개신교내 다수의 보수 분파들은 김대중, 노무현 이라는 잇따른 개혁세력의 집권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누렸던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전면에 등장한 ‘반미친북’ 세력은 그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 및 반미감정의 확산으로 인한 개신교의 위기감은 전통적으로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적 시각을 고수하는 보수 교권세력내의 5060세대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신 교권그룹의 헤게모니적 지배 실현의 물적 토대가 이미 90년대에 갖추어진 가운데 이들이 교권상층부를 점유함에 따라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 개신교 진영의 위기상황은 이들의 적극적 대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개신교 신 교권세력의 헤게모니적 지배실현에 도덕적 지배 정당성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기회이자 동시에 시험대였다. 개신교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함을 통해 그들의 권력 독점에 대한 대다수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담론을 양산해 낼 수 있는 지의 여부가 그 핵심이었다. 기존의 정치 사회적 진보 보수의 구분과는 차별적으로 범 교회적 동의를 얻어 낼 수 있는 대 사회적 해석과 프레임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이들이 개신교내 헤게모니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의 형성을 위해 개신교내 신 교권세력은 적극적으로 정권의 성격을 규정짓기 시작하였으며 보수 기독교 세력의 오랜 기간 동안의 정교 분리의 원칙을 깨고 적극적인 정치 및 사회참여의 프레임 마련을 위한 ‘신학적 재해석’작업 또한 실시하였다.

이 시기에 신 교권그룹이 양산한 두 가지 담론은 ‘교회 일치’에 대한 것과 ‘친미반공’에 대한 담론이었다. 이 두 가지 담론은 이들 신 교권그룹의 교회 및 사회에 대한 해석 프레임에 기반 한 것으로 표면에 드러나기로는 내외적으로 개신교를 대표하는 담론처럼 보였다. 또한 이들은 이 담론을 바탕으로 전 개신교인의 참여를 호소하며 구국기도회 및 기독교 정당 창당 등을 통한 정치, 사회세력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신감과 위기감의 기묘한 결합에 의한 것으로서 90년대 이들 신 교권세력이 가진 대규모 물적 및 인적 동원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더불어 연속적인 개혁적 정권의 집권 및 사회적으로 반미친북 정서의 확장을 통한 세계관의 위기 그리고 끝없는 사회적 공신력 하락에 대한 위기감이 동시적으로 발현한 결과물 이었다.

그러나 신 교권세력이 교권 최상층 중심의 대 사회 및 교회를 해석하는 프레임을 가지고 정치 및 한국 사회전반에 대한 개입을 통해 추진한 개신교 내부 뿐 만 아니라 사회적인 헤게모니 세력화의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이들이 적극적으로 유포한 측면이 있는 친미반공이데올로기에 기반 한 대규모 장외 기도집회는 보수우익의 대 사회적 발언의 창구 역할이 됨에 따라 개신교 내 무르익던 교단 간 통합논의에 균열을 내는 방식으로 작동하였다. 교회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 방식이었던 기독교 정당의 설립이나 구국기도회를 통해 극단적인 보수 우파임을 자임하는 상황 등은 교회의 정치 참여 방식에 대한 논란 뿐 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그 궤를 달리한 성직자 내 여러 분파간의 차별 점을 더욱 확연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개신교의 성장과 직결된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 하락에 대한 대응에 있어 교권 최상층이 그 위기 원인을 교회 외부화 하면서 교단 중심의 통합논의에만 그친 것 역시 그 위기의 원인을 내부화 하면서 교회 개혁운동을 펼친 개신교 내 시민운동 그룹과의 연대 소통을 어렵게 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핵심 교권 세력은 대 사회 및 교회에 대한 해석 프레임에 세대 문제를 반영하지 못함에 따라 세대간의 심각한 단절을 경험해야 했다. 개신교 장을 수직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친미반공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구국기도회는 개신교 2030세대를 광장으로 이끌어 내기에 역부족 이었던 것이다. 결국 90년대 교단을 초월한 연합의 형식으로 형성된 신 교권그룹의 헤게모니 전략은 개신교의 위기상황에서 개신교 모두를 통괄하는 담론을 양산하지 못함에 따라 헤게모니적 지도세력으로서의 물적 토대만을 갖추었을 뿐 개신교내 도덕적, 담론적 지도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