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4월 29일 03시 01분
한국에서 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IMF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담론과 규모의 측면에서 확산 및 확장을 거듭하며 제도화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개별기업의 전략적 필요와 해외 진출 대기업들의 모방적 동형화로 인해 실험적으로 이식 및 도입 되었던 CSR은 IMF 이후 급속히 확산되며 한국의 재벌집단 기업들을 중심으로 정당성 확보의 지배적 수단으로 채택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사회공헌 지출, 사회공헌 전담조직 및 기업재단의 설립은 경기변동과의 연동도 없이 꾸준히 확장을 겪는데, 현 시점 2017년을 기준으로 주요 대기업 198개사는 2조 7243억원 (평균 세전이익 대비 2.2%)을 지출하고 있다. 총 이익 대비 지출 비율로만 보면 전략적 CSR을 활발히 실천하는 일본과 미국의 대기업과 비교했을 때도 더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이 제도적 확산의 정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제도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한국의 기존 연구는 기업의 CSR 도입과 규모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압력, 압력에 취약한 기업, 그리고 학습과 모방을 통해 제도를 이식하는 수용기관들의 종류에 대해 통계적으로 검증하며 동형화의 패턴을 살펴보았다. 선행연구에서 정리된 바에 따르면 한국의 CSR은 IMF 이후 정당성과 불신의 문제를 겪는 재벌을 중심으로 미국식 CSR을 이식 (transplant)하는 방식으로 기업집단 내부에서는 강압적 동형화가, 그리고 외부로부터는 모방적 동형화가 동시에 진행해왔다.
하지만 CSR의 도입에 있어 재벌집단의 주도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에서는 ‘재벌’이라는 조직론적 변수가 CSR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선행연구의 공백이 존재했다. 이 글에서는 재벌집단 별로 CSR 제도가 진화되고 있는 현 시점, 그 전략이 재벌의 조직론적 성격에 의해 독특하게 구조화 되는 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미국식 외형적 CSR이 한국에 도입되고 진화되는 과정에 있어서 한국 고유의 조직론적 변수인 ‘재벌’로 인한 CSR의 한국적 접변화 (acculturation) 현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연구는 선행연구의 공백과 양적 자료의 빈약함을 받아들이며, 탐색적 단일 사례연구의 방법을 통해 하나의 대표적 사례에서 드러나는 패턴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서 추후 연구에 대한 초석으로 기능하고자 한다. 사례연구의 대상은 2006년부터 현재 (2019년)까지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SK의 사회적기업 생태계 지원과 사회적 가치 측정 체계 도입으로서의 CSR 전략으로 설정하였다.
SK는 1) 사회적 기업의 직/간접 설립, 2) 사회적 기업의 제품을 대상으로 한 구매시장 제공, 3) 사회적 가치 측정체계의 개발 및 적용, 4) (측정된) 사회적 가치에 비례하는 지원금 제공, 그리고 5) 계열사들의 사회적 가치 측정과 모니터링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적기업의 생태계를 확산하는 방식의 CSR 전략을 차례로 실천해왔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각각의 CSR 전략이 도입되고 전파되는 양상, 그리고 각각의 전략이 구체적으로 구조화 되는 양상이 SK의 재벌론적 특성에 크게 영향을 받아왔음을 보인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SK는 1) 2000년대 초반 이후 거버넌스 문제를 위시한 정당성 위기와 규범적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CSR의 확산을 추구한다. 2) 초기 제도공백기에는 선발주자 계열사로서 사회공헌전담실이 있는 SK 텔레콤에서 사회적기업에 대한 지식이 습득되고, 텔레콤의 인원이 (그룹 차원의 CSR의 허브에 해당하는) 행복나눔재단으로 이식되며 모방적 동형화 과정이 그룹 전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후 3) 제도적 기업가 (institutional entrepreneur)로서 그룹 총수 (최태원)의 역할 (그리고 사회적가치연구원과 행복나눔재단이라는 제도 수용체/전담기관)이 적극적으로 작용하며 새로운 각각의 이니셔티브가 도입되고 내부 CSR의 진화가 이루어진다.
이에 더해 SK의 CSR 전략은 1) 자금과 인적자본의 상향적 결집 및 하향적 분배, 2) 지분망 구조의 전환을 통한 사회적기업 구매시장 체계 및 자원처 확보, 3) 사회적 가치 측정 체계의 자생적 개발을 통한 평판시장 공백의 대체, 그리고 4) 제도적 기업가로서 그룹 총수가 제기하는 이니셔티브와 영향력으로 인해 구조화 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렇게 CSR 제도가 한 기업집단 내에서 진화하는 양상은 재벌집단 내에서 발견될 수 있는 대표적 조정양식과 구조적 역량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